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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5. 15世 〉4. <부정공>옥천조공휘광서행록(玉川趙公諱光瑞行錄)
1. 문헌 목록 〉15. 15世 〉6. <부정공>증통훈대부사복시정공휘경운묘갈명(贈通政大夫司僕寺正公諱景耘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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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정공>성균생원화은공휘당묘갈명(成均生員華隱公諱儻墓碣銘)
成均生員華隱公諱儻墓碣銘 昔我 元陵盛際朝廷擧賢良郡縣薦才行湖南文學之士如黃翊贊胤錫申承旨景濬諸公同時輩出而我華隱公諱儻字士英亦其一也玉川之趙源於高麗檢校侍中諱璋其後有忠獻公諱元吉典農副正諱瑜當鼎遷之際勳庸節義爲王氏完臣以至表宅享祠入本朝參議諱斯文之四子曰僉知智山曰縣監智崑曰察訪智崙曰參判智崗連累於季父節愍公丙子之禍次第退斥而但友于克篤相好有亭至今爲南州矜式自縣監公屢傳至泰仁監務諱大承訓鍊奉事諱珏通德郎諱義吉諱時鼎時鼎公無嗣以察訪公六世孫校尉時夏子維城爲子即公皇考也淳昌槽洞之寓從先訓云公以 肅宗庚辰嶽降幼而聰強甫五歲能誦六七十行及長善事二親前後艱殯殮葬祭一遵家禮其爲學也淹貫群書府庫充實故至於程文無不具體而表策最其擅長大小發解凡十餘選乃於 英宗甲戌增廣中生員試十載居泮爲掌議者三舘中皆推爲領袖黃頤齋申旅庵相資以麗澤也享八十四春秋而吿終實 正宗癸卯十月三日葬槽洞後麓負丑原配錦城羅氏進士以樺女海州呉氏天受女墓各異塋有二男徽命允命出系뒃瑹長房出瓊溥鎭溥武府使進士王學龍妻過房出曾玄不盡錄噫公之才器文行可以見用於有道之世而只得以一小成成名朝廷之得人而不能用竊爲秉銓者惜之余嘗聞之奇蘆沙先師曰昔我槽洞之寓舍即趙上舍舊廬洞中耆耈徃徃説及公之事至於喫着不甚嬰意一日束馬朝出行數十里御者吿食時曰汝果飢乎遂深行囊出予數棗啖之數里餘又吿日高時晏曰俄喫數棗亦不耐飢眞食粟漢云此宜愚者以爲愚賢者以爲賢而居人之至今以高行誦説如出一口必有以入人者深余識之巳久公之五世孫昌炫徵以阡銘固不敢當亦不敢辭玆就族叔紫谷翁所述行錄暨先師所稱淳人説一段序而銘之曰祖於相好孝友敦睦早遊洋舍褥紳矜式居人尚誦足徵懿德菀彼佳城槽洞之原令名不朽片石堪言 傍孫 泳萬 謹撰 성균생원화은공휘당묘갈명(成均生員華隱公諱儻墓碣銘) 옛적 영조(英祖) 성제(盛際)에 나라에서 어진 선비를 기용하고 고을에서 덕행있는 사람을 천거하니 호남 문학의 선비에 익찬 황윤석(黃胤錫)과 승지 신경준(申景濬) 제공같은 이가 한꺼번에 나오고, 나의 화은공(華隱公) 휘 당(儻)의 자 사영(士英) 또한 그중 한 사람이었다. 공은 옥천인인데 부정공 휘 유의 후예로 여러 대를 거쳐 태인현감 휘 대승(大承), 훈련봉사(訓鍊奉事) 휘 각(珏), 통덕랑(通德郎) 휘 의길(義吉), 휘 시정(時鼎)에 이르러 시정공이 후사가 없어 찰방공(察訪公)의 六세손 교위 시하(時夏)의 아들 유성(維城)으로 양자를 삼으니 곧 공의 황고(皇考)이고 순창 조동(槽洞)으로 우거한 것은 선훈(先訓)에 따를 것이다. 공은 숙종 경진년(一七○○)에 탄강하여 어려서 총명하고 강장하였으며 겨우 五세에 능히 五十∼六十줄을 외우었으며 장성하매 부모를 잘 섬기고 전후 상사 때에는 염빈장제(殮殯葬祭)를 가례(家禮)대로 준행하고 그 학업은 모든 서적을 관통하였으며 역량이 넘쳐 과문에 체계를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으므로 대소 향시(鄉試)에 十여 차 장원으로 뽑히고 영조 갑술(一七五四)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다년간 태학에 있으면서 세 번 장의(掌議)가 되니, 관중(舘中)이 다 추대하여 영수(領袖)를 삼았다. 황이재(黃頤齋) 신여암(申旅庵)과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수양에 힘써 노력했다. 정조 계묘년(一七八三) 十월 三일에 향년 八十四세로 별세하니 조동 후록 축좌 언덕에 안장하였다. 배는 금성나씨(錦城羅氏) 진사 이화의 따님과 해주오씨(海州呉氏) 천수의 따님인데 묘소는 각각 다른 곳이다. 二남은 휘명(徽命)·윤명(允命)인데 윤명은 출계하였고, 손자 기(뒃)·서(瑹)는 장방출이요 관부(瑻溥)·무부사(武府使) 진부(鎭溥), 진사 왕학룡(王學龍)의 처(妻)는 과방(過房)출이며, 증현(曾玄)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공의 재기와 문행이 가히 써 유도지세(有道之世)에 수용(需用)할 것인데 다만 적은 것만을 얻어 그치고 말았으니 조정에서 사람을 얻고 쓰지 못한 것은 실로 실권 잡은 자를 위하여 가석한 일이도다. 내가 일찌기 들으니 노사선사(蘆沙先師)말씀이 『전에 내가 살던 槽洞의 집은 바로 趙上舍의 옛집이었다.』 하시었고, 동네 늙은이들도 가끔 공의 일을 말하였다. 의복과 음식에 마음을 쓰지 아니한 공은 어느날 말을 치장하여 아침부터 수십리를 달렸다. 마부가 밥 때가 되었다고 알리니 『네가 배가 고프구나』하고 마침 행낭에서 대추 두어개를 내어주며 씹으라 하면서 수리(數里)를 더 갔는데 마부가 또다시 해가 높고 때가 늦었다 하니 방금 대추 몇 알을 먹고도 주림을 못 참으니 참 다식한(多食漢)이로다 하였다. 이것이 마땅히 미련한 자를 미련하다 하고 어진 자를 어질다 한 것이라. 동민(洞民)이 지금까지 행의가 높다 칭송하니 반드시 사람이 깊이 감복한 바이요, 나도 이 사실에 대하여 안지 이미 오래이다. 공의 五세손 창현(昌炫)이 묘명(墓銘)을 청하매 사절치 못하고 이에 죽숙 자곡옹(紫 谷翁)이 기록한 행록과 및 선사(先師)의 일컬은 바 순창 사람의 말 일단을 증거로 서(序)하여 다음과 같이 銘한다. 상호 후예로 相好後裔 효우돈목하고 孝友敦睦 일찍 태학에 놀아 早遊洋官 학사의 모범이 되었도다. 襟紳矜式 거민이 높이 송덕하니 居人尚誦 족히 아름다운 덕행을 증거하였도다. 足徵懿德 울연한 저 가성은 菀彼佳城 조동의 언덕이로다. 槽洞之原 착한 명망이 썩지 아니함을 令名不朽 빗돌이 영원히 말하리라. 片石堪言 傍孫 泳萬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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